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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Culture

이토히로부미에게 돌을 던진 원태우 지사

by 더공 2011. 8. 24.
원태우
원태우 (元泰祐) 의사
1882년 3월4일 과천면 안양리 642번지(현재 안양시 만안구 안양1동 642번지)에서 출생 하셨다. 원의사께서는 1905년 11월22일 이토이로부미가 수원에 사냥을 갔다가 안양을 거쳐 서울로 가는 열차를 타고 서리재고개(현재 안양육교)를 지날때 혼자의 몸으로 돌을 던져 큰 상처를 입히고 일경에 체포 구금되었다.

이 의거는 민간 항일운동의 효시가 된 거사로써 당시 대판매일신문, 대한매일신문, 동경매일신문 등의 언론은 물론이요, 일본이 제작한 일로전쟁화보와 속음청사에도 그 내용이 수록된 일대 사건이었다.

원 의사께서는 1906년 1월24일자로 모진 고문과 옥고를 치루었다. 당시의 고문으로 평생을 불구의 몸으로 지내신 원의사께서는 69세의 일기로 수푸루지(지금의 안양 비산동)에서 타계 (1950년)하셨다. 그 후 40년이 지난 1990년 정부에 의해 건국훈장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안양에 오래 살고 있으면서도 안양을 둘러보는데는 다소 인색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안양역 입구 벽면에 볼 수 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몇번 안내판에 있는 글을 읽었지만 오고 가면서 봤던 것과 다르게 이렇게 앉아서 꼼꼼히 읽어보니 참으로 대단한 일을 했던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여러 안내 판에서는 의사(義士)와 지사(志士)를 혼용해서 쓰고 있습니다. 안양역에는 “원태우(元泰祐) 의사(義士)”로 표기되어 있고, 다른 곳에는 “원태우(元泰祐) 지사(志士)”로 나와 있는데 정확한 것은 “지사(志士)”가 맞는 말 입니다. 사실, 애국에 있어서 의사면 어떻고 지사면 어떻겠습니까. 오히려 원태우 지사님 처럼 모진 고문으로 더욱 힘들게 지내시다 운명을 달리하신 분들이 더 많은데 말입니다. 그래도 명칭이 달리 사용되고 있으니 그에 맞게 수정할 부분은 수정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민족의 원흉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하리라!!
어쨌든 '원태우 지사'께서 '이토히로부미'에게 돌을 던진 사건은 그 파장이 상당히 컸던 모양입니다. '이토히로부미'가 부상을 입어 여러 곳에 신문이 실릴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합니다. 원태우 지사는 이 일로 약 두달간 감옥에 갖혀 고문을 당하고, 남은 평생을 불구의 몸으로 지냈다 합니다.


의문 1. 어떻게 달리는 기차를 향해 정확하게 던질 수 있나?
위의 내용으로 보면 이토히로부미가 탄 기차를 향해 돌을 던져서 큰 부상을 입혔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정확하게 돌을 던질 수 있느냐가 의문일텐데 1905년 당시 기차 속도는 시속 20km~30km로 운전면허 시험장에서 볼 수 있는 속도로 열차가 달렸다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 그 속도 또한 당시로써는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였겠지만 그 느린 속도로 달리는 열차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앉은 의자를 향해 돌을 던졌고, 유리창이 깨지면서 큰 부상을 입은 것이지요.

의문 2. 높은 열차의 창문을 어떻게 볼 수 있었나?
돌을 던진 위치가 중요합니다. 현재 석수 IC가 있는 곳이 안양육교 입니다. 예전 말로는 서리재고개라는 말인데 아래 사진으 보시면 그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진의 오른편은 일반 도로가 있는 곳이고, 왼편은 기찻길입니다. 기차길은 상당히 낮은 곳에 있어서 비탈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지나가는 기차를 향해 정확하게 돌을 던질 수 있는 것이죠.
원태우
돌 던진 곳을 직접 찾아가 봤습니다

안양역에서 버스를 타고 안양자동차학원 맞은편까지 가봤습니다. 표지석은 원태우 지사께서 이토히로부미에게 돌을 던진 곳에 세워져 있습니다. 안양자동차 학원 맞은편입니다. 바로 옆은 철도길로 철길은 아래로 움푹들어간 곳입니다. 예전 지명이 서리재고개로 이곳은 고개였으며 그 고개를 뚫고 기찻길을 만들었으니 거사를 치루기에는 더 없이 좋은 조건이었죠.

원태우 지사 의거지 정확한 위치는 관악역에서 서울 방향으로 300미터 정도 올라오시면 안양자동차학원 맞은편에서 이 표지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열차를 전복 시켜라!!
원래 계획은 돌을 쌓아 기차를 전복시켜 이토히로부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같이 참여했던 ‘이만려’가 돌을 치워서 열차 전복 계획은 무산이 됩니다. 이에 원태우 지사는 단독으로 거사를 하게 됩니다. 다가오는 열차에 돌을 던져 유리 파편 8조각이 이토히로부미의 얼굴에 박히게 합니다. 이 의거 이후로 본격적인 항일운동이 시작되었고, 이후 적극적인 독립운도이 시작되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원태우
원태우 지사 의거지
이곳은 안양 출신 원태우 (1882-1950) 지사가 1905년 11월 22일 민족의 원흉 이토를 향해 정의에 돌을 던져 대한 남아의 기개를 만방에 떨친 역사의 현장이다. 일제에 의해 1905년 11월17일 강제로 외교권을 빼앗긴, 이른바 을사조약에 비분 강개하여 단신으로 거사를 강행 이토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 거사후 원지사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모진 고문후 이듬해 1월 풀려났으나 평생을 불구로 지내다 1950년 한국전쟁때 69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바로 주변에 이렇게 무궁화를 볼 수가 있습니다. 가을 날씨 같은 깔끔한 날씨에 파란하늘까지..
안양역 벽면에 있는 사람이 누굴까 해서 찾아다녀본 하루였습니다. 더불어 안양의 옛 지명까지 알게 된 소중한 하루였습니다. 안양육교는 “서리재고개”, 안양 비산동은 “수푸루지”라는 귀에 쏙쏙 들어오는 이름이었습니다.

역사책에만 실려 있는 유명한 의사(義士)분들 이외에도 전국 곳곳에서 나라를 잃은 설움을 표출하시고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에 묻히신 분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리 지역에는 어떤 분들이 있는지 한번 둘러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원태우 지사가 이토히로부미에게 돌을 던졌을 때가 1905년 24살이었는데 저는 24살에 뭘 하고 있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