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도 오락가락하고, 해는 뜨지 않았는데 아주 더운날이었습니다. 사실 주말에 집에서 빈둥대다가 조금 시원하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해서 무작정 전철을 탔습니다. 저녁에는 부천에서 약속이 있어서 겸사겸사 조금 이른 시간에 집에서 나왔습니다. 시원한 전철을 타고 두어시간 뺑뺑이 돌 생각이었습니다. 1호선을 타고 올라가다보니 노량진역이더군요. 원래는 청량리까지 갔다가 거기서 다시 인천행을 타고 부천에 갈까 했는데 지하철 역에 설치된 가볼만한 곳에 "사육신묘"라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바로 노량진역에서 내렸습니다. 노량진은 마치 항구 같은 느낌입니다. 짭쪼름한 바다향이 나고 그 바다향 속에 생선냄새가 나는 그런 바다향기 있잖아요. 오래 사신 분들은 그런 냄새도 힘들다고 하시던데 저는 가끔 맡으니 색다르더군요. 서울 시내에서 바다향을 느끼기 쉽지 않잖아요.
“역사 선생님보다 더 재미있었던 수학선생님
사육신묘를 향해 걸어가면서 중학교 수학선생님이 생각났습니다. 수학선생님은 얘들이 졸고 있다 생각하면 뜬금없이 역사 얘기를 했었습니다. 사육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했었는데 사육신은 "언제, 어떻게, 누가, 무엇을, 왜, 했나"로 풀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 그래서 성삼문은 이렇게 했는데, 당시에 그런 일을 하면 어땠을까?"라며 아이들과 소통을 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갔습니다.
사육신 한명 한명의 이야기부터 주변 상황까지 마치 대하소설을 한편 읽는 수준이었죠. 학기초 수업중에 잠깐 잠깐 이야기 하던 사육신 이야기는 학기가 끝날때쯤에서 마무리가 됐었습니다. 어린나이었고 역사와 국사에 대해서 잘 모르는 시기였지만 수학 선생님이 얘기하던 사육신 이야기는 시골 중학교 학생들의 기억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사육신 이야기는 다 까먹고 이름만 간신히 기억을 하게 됩니다.
잠깐 어렸을때에 추억에 빠져 걷다보니 금방 〈사육신 공원〉에 도착을 했습니다. 노량진역 1번 출구로 나와 한강대교쪽으로 5분정도 걸어 올라가다보면 금방입니다.
바로 노량진역에서 내렸습니다. 노량진은 마치 항구 같은 느낌입니다. 짭쪼름한 바다향이 나고 그 바다향 속에 생선냄새가 나는 그런 바다향기 있잖아요. 오래 사신 분들은 그런 냄새도 힘들다고 하시던데 저는 가끔 맡으니 색다르더군요. 서울 시내에서 바다향을 느끼기 쉽지 않잖아요.
“역사 선생님보다 더 재미있었던 수학선생님
사육신묘를 향해 걸어가면서 중학교 수학선생님이 생각났습니다. 수학선생님은 얘들이 졸고 있다 생각하면 뜬금없이 역사 얘기를 했었습니다. 사육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했었는데 사육신은 "언제, 어떻게, 누가, 무엇을, 왜, 했나"로 풀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 그래서 성삼문은 이렇게 했는데, 당시에 그런 일을 하면 어땠을까?"라며 아이들과 소통을 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갔습니다.
사육신 한명 한명의 이야기부터 주변 상황까지 마치 대하소설을 한편 읽는 수준이었죠. 학기초 수업중에 잠깐 잠깐 이야기 하던 사육신 이야기는 학기가 끝날때쯤에서 마무리가 됐었습니다. 어린나이었고 역사와 국사에 대해서 잘 모르는 시기였지만 수학 선생님이 얘기하던 사육신 이야기는 시골 중학교 학생들의 기억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사육신 이야기는 다 까먹고 이름만 간신히 기억을 하게 됩니다.
잠깐 어렸을때에 추억에 빠져 걷다보니 금방 〈사육신 공원〉에 도착을 했습니다. 노량진역 1번 출구로 나와 한강대교쪽으로 5분정도 걸어 올라가다보면 금방입니다.
사육신 사당을 둘러보면 겉으로는 평화롭고 조용하지만 그 뒷편의 내용을 보면 조용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육신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이 있습니다. 박팽년, 성삼문, 유응부, 이개, 하위지, 류성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육신 사당과 역사관을 둘러보면 김문기라는 인물이 보입니다. 검색창에 사육신 김문기를 검색해 보면 상당히 많은 논란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양측의 사육신 논쟁은 거의 논문 수준이고 일반인들이 하나하나 접근하기 상당히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사육신을 모신 사당입니다. 저 앞에 앉아 계신 분들은 외국인 여자분들입니다. 날 더운데 왜 뙤약볕에 저러고 앉아서 있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습니다.
사당에서 바라본 입구의 모습입니다. 오른편 하단에 보시면 외국인 여자들이 앉아 있는데 사실 이분들 때문에 정면에서 사진을 찍지 못했습니다. 거의 핫팬츠 차림으로 한참동안 떠들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더라고요. 이곳은 떠드는 곳이 아니니까 조용히 대화하라고 한번 주의를 주니까 조용해지더군요. 외국인 관광객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할 문제였습니다.
“외국인은 제외?
이곳은 사육신을 모신 사당입니다. 향을 피우고 경건하게 있어야 하는 곳이죠. 몇분의 나이드신 분들이 오셔서 향도 하나씩 올리고 외국인들을 한번 힐끗 보고서는 전부 그냥 가시더군요. 만약 한국 사람들이 이곳에서 저런 차림으로 시끌시끌하게 있었다면 어르신들은 어떤 행동을 했을까요? 가만 놔뒀을까요? 아니면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줬을까요?
“외국인은 제외?
이곳은 사육신을 모신 사당입니다. 향을 피우고 경건하게 있어야 하는 곳이죠. 몇분의 나이드신 분들이 오셔서 향도 하나씩 올리고 외국인들을 한번 힐끗 보고서는 전부 그냥 가시더군요. 만약 한국 사람들이 이곳에서 저런 차림으로 시끌시끌하게 있었다면 어르신들은 어떤 행동을 했을까요? 가만 놔뒀을까요? 아니면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줬을까요?
사육신 사당
조선 제6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목숨을 바친 사육신을 모신 곳이다. 단종3년 음력 윤 6월(1455)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고 즉위하매 이에 의분을 품은 충신들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탄로되어 참혹한 최후를 마치니 이들을 훗날 사육신이라 부르고 있다. 사육신의 충성심과 장렬한 의기를 추모하고자 숙종7년(1681) 이 산 기슭에 민절서원을 세웠고, 정조 6년(1782)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전해오다가, 1955년 5월 육각의 사육신비를 세웠다.
1978년 서울특별시에서는 이 의로운 충혼들을 위로하고 불굴의 충의 정신을 널리 현장하고자 3,240평이었던 묘역을 9,3670편으로 확장하고 의절사, 불이문, 홍살문, 비각을 새로 지어 충효사상의 실천도장으로 정화하였다. 본래 이 묘역에는 박팽년, 성삼문, 유응부, 이개의 묘만 있었으나 그후 하위지, 류성원, 김문기의 허묘도 함께 추봉하였다.
조선 제6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목숨을 바친 사육신을 모신 곳이다. 단종3년 음력 윤 6월(1455)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고 즉위하매 이에 의분을 품은 충신들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탄로되어 참혹한 최후를 마치니 이들을 훗날 사육신이라 부르고 있다. 사육신의 충성심과 장렬한 의기를 추모하고자 숙종7년(1681) 이 산 기슭에 민절서원을 세웠고, 정조 6년(1782)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전해오다가, 1955년 5월 육각의 사육신비를 세웠다.
1978년 서울특별시에서는 이 의로운 충혼들을 위로하고 불굴의 충의 정신을 널리 현장하고자 3,240평이었던 묘역을 9,3670편으로 확장하고 의절사, 불이문, 홍살문, 비각을 새로 지어 충효사상의 실천도장으로 정화하였다. 본래 이 묘역에는 박팽년, 성삼문, 유응부, 이개의 묘만 있었으나 그후 하위지, 류성원, 김문기의 허묘도 함께 추봉하였다.
사육신묘 (사육신 사당 뒷편)
사육신 사당 오른편으로 보면 뒤로 나갈 수 있는 작은 문이 있습니다.
그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면 사육신 묘를 볼 수 있습니다.
사육신 사당 오른편으로 보면 뒤로 나갈 수 있는 작은 문이 있습니다.
그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면 사육신 묘를 볼 수 있습니다.
사육신사당 뒷편으로 가보면사육신의 묘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소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것들을 보게 되는데 처음 눈에 띄인 것은 바로 기울어져서 쓰러질 듯 놓여 있는 비석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묘가 있는 바로 앞도 아니고 다소 떨어진 곳에 놓여져 있는 비석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곳곳에 방치된 흔적들....
그 다음에 궁금한 것이 바로 이 문인석이었습니다. 주변을 한바퀴 돌면서 문인석 두개를 발견했는데 하나는 몸통의 절반이 파뭍혀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전부 나와 있지만 역시 버려진 것처럼 기울어져 있고, 온갖 풀로 둘러 쌓여 있어서 이 문인석이 사육신 묘에 있던 문인석인지 아닌지에 대한 조사가 필요할 듯 했습니다.
더군다나 묘 뒷편으로는 건물 기초석이 여럿보였습니다. 사육신묘에 대한 내용을 보면 "숙종7년(1681) 이 산 기슭에 민절서원을 세웠고, 정조 6년(1782)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전해오다가, 1955년 5월 육각의 사육신비를 세웠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묘역 이외에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인데, 아직도 제대로 뭔가가 이뤄지지 않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끔 이렇게 어딘가를 소개하려고 가보면 소개보다는 문제점이 더 많은 곳을 볼 수 있습니다. 살짝 아쉽지만 고쳐질건 고쳐져야 이곳을 찾는 분들이 더욱 좋은 모습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 다음에 궁금한 것이 바로 이 문인석이었습니다. 주변을 한바퀴 돌면서 문인석 두개를 발견했는데 하나는 몸통의 절반이 파뭍혀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전부 나와 있지만 역시 버려진 것처럼 기울어져 있고, 온갖 풀로 둘러 쌓여 있어서 이 문인석이 사육신 묘에 있던 문인석인지 아닌지에 대한 조사가 필요할 듯 했습니다.
더군다나 묘 뒷편으로는 건물 기초석이 여럿보였습니다. 사육신묘에 대한 내용을 보면 "숙종7년(1681) 이 산 기슭에 민절서원을 세웠고, 정조 6년(1782)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전해오다가, 1955년 5월 육각의 사육신비를 세웠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묘역 이외에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인데, 아직도 제대로 뭔가가 이뤄지지 않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끔 이렇게 어딘가를 소개하려고 가보면 소개보다는 문제점이 더 많은 곳을 볼 수 있습니다. 살짝 아쉽지만 고쳐질건 고쳐져야 이곳을 찾는 분들이 더욱 좋은 모습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INFO
사육신묘(死六臣墓)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호
주소 : 서울 동작구 노량진1동 185-2
문의 : 서울특별시 동작구 문화공보과 02-820-1261
개방시간 : 9:00 ~ 17:30
사육신묘(死六臣墓)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호
주소 : 서울 동작구 노량진1동 185-2
문의 : 서울특별시 동작구 문화공보과 02-820-1261
개방시간 : 9:00 ~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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