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난파가옥
홍난파(洪蘭坡, 홍영우)
(1898년 4월 10일; 음력 3월 19일 ~ 1941년 8월 30일)
한국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로, 본명은 홍영후(洪永厚)이지만 홍난파로 더 알려져 있다. 한동안 음악평론가로 활동하면서 한국의 슈베르트라고 불리기도 하였다.[1] 작품 중 〈봉선화〉. 〈고향의 봄〉.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고향 생각〉등 십 여곡의 가곡과 〈오빠생각〉. 〈나뭇잎〉. 〈개구리〉 등 111개의 동요를 작곡하여 천재 작곡가로 알려졌다. 아호는 난파(蘭坡)이다.

홍난파가옥
서울 성곽길, 경희궁 뒷편길을 따라 쭉 올라오면 딜쿠샤에 가기 바로 전에 만날 수 있는 홍난파 가옥입니다. 뒷편으로는 인왕산이 보이고 바로 옆에는 기상관측소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딱 이맘때 쯤이었습니다. 이곳을 방문한 날짜는 작년 이맘때였습니다. 서울 뒷골목을 정처없이 사진찍으며 돌아다니다 만난 홍난파 가옥은 근대건축의 모양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담쟁이 덩쿨이 빨간 벽돌 사이사이로 덮고 있어 따듯한 느낌이 드는 집 입니다. 마치 옛날에 그림 그리라고 하면 이런 모양의 집을 그렸던게 생각이 납니다. 마침 찾아갔을 때에 관계자 되시는 분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건물의 역사와 그 이전에 살던 사람들, 그리고 당시의 고문과 이후 친일 인명사전에 등재되고 소 취하하는 것까지 정말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홍난파 가옥은 교통편이 다소 불편합니다. 실제로 마을버스나 자가용이 아니면 한참을 걸어들어와야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저는 원래 목적이 이곳은 아니었는데 그냥 우연찮게 둘러본 곳입니다. 서울 여행이나 역사 여행을 하신다면 꼭 한번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홍난파가옥 홍난파가옥
홍난파가옥
홍난파가옥 홍난파가옥
홍난파가옥
건물 내부를 둘러보면 현대식으로 보이지만 기본 골격은 기존 그대로라고 합니다. 이 건물을 소유하고 있던 개인도 이 가옥이 너무 좋아 구조변경을 최소한으로 해서 지냈었다 합니다. 마루바닥은 원형 그대로입니다. 생전에 쓰던 여러 물품과 연대별로 장리해 놓은 팜플릿등을 볼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최대한 원형대로 해 놓고 있다보니 냉난방이 거의 안된다고 합니다. 겉으로 보기엔 창문과 빨간 벽돌 집이 너무 예쁜데 달랑 유리창 하나라 겨울엔 찬기운이 들어오고, 여름에 뜨거운 열기가 그대로 내부로 들어온다고 하네요.

홍난파가옥 홍난파가옥
홍난파가옥
■ 홍파동 홍난파 가옥

서울 종로구 송월1길 38, 2-46 (홍파동)
­홍파동 홍난파(洪蘭坡) 가옥은 1930년에 독일 선교사가 지은 붉은색 벽돌 벽체에 기와를 얹은 서양식 건물로, <봉선화>, <고향의 봄> 등으로 유명한 작곡가 홍난파(洪蘭坡)(1898~1941)가 6년간 말년을 보낸 집이다. 토지 304㎡에 연면적은 지상, 지하 각 1층 121㎡ 규모이다. 이곳은 개·보수 공사를 끝내고 2007년 9월 소공연장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거실과 안방으로 사용하던 지상 1층에 음향시설 등을 설치하여 50명 정도 수용 규모의 공연장으로 만들었으며 지하에는 자료실과 시청각실을 만들어 홍난파 관련 서적과 비디오테이프 등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서양식 주택의 특성이 잘 보존되어 있는 근대문화유산으로 가치 있는 건축물이다.

홍난파가옥
홍영우(홍난파)는1937년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 투옥됩니다. 계속된 고문으로 늑막염이 크게 악화되게 됩니다. 그 상태로 72일간 고문을 당하고, 일본에 협조한다는 글과 노래를 만들겠다는 전향서를 쓰고 석방이 됩니다. 이후 1941년 적십자병원과 경성요양원(현재 삼육서울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지만 1941년 8월 30일에 결핵균이 머리로 들어가게 되면서 경성요양원에서 숨을 거두게 됩니다.

이후 친일파708인 명단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이 됩니다. 유족들은 옥고를 치루며 어쩔 수 없이 강제로 전향서를 쓰게 됐고, 협박 때문에 친일 행위를 했다는 사실로 2009년 11월26일 친일행위조사결과 통지처분 효력정지를 신청하고, 친일파 등재 유보결정이 내려집니다. 그러나 2010년 11월4일 소송 선고 하루 앞두고 유족들은 소송 취하를 하게 됩니다. 이후 공식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 진상규명 보고서에 실리게 됩니다.

유족이 자진해서 소 취하를 한 이유는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친일 행위를 했더라도, 친일 행위를 했다는 것은 사실이라는 것이죠. 아직도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홍난파가옥

전체적인 규모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한바퀴 둘러보는데 10분도 걸리지 않지만 꼼꼼히 샆펴 보시고, 얘기도 나누시면 좋습니다. 이곳 홍난파 가옥에서는 종종 음악회가 열리는 곳으로도 사용됩니다. 전체 50명 정도 앉을 수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 보면 20명 정도가 앉으면 꽉 찰 듯 합니다. 꽃피는 봄이 되었으니, 경희궁도 둘러보시고, 특히 이곳의 코스는 서울 성곽길 바로 옆에 있으니 오고가며 둘러보시면 아주 좋을 듯 합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교통편
전철 : 3호선독립문역 3번 출구에서 800m, 5호선 서대문역 3번 출구 700m
버스 : 471,  701,  702A,  702B,  703
마을버스 : 종로 05번


홍파동 교남동



“종로구 홍파동, 교남동 사라지기전...

종로는 문화와 역사가 가득한 곳이라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서울 교육청 앞길로 쭉 올라가다 보면 달동네 같은 풍경이 펼쳐집니다. 바로 뒤에 인왕산이 보이고 그 인왕산을 배경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인왕산 성곽길로 접어들 수 있고, 딜쿠샤와 홍난파 가옥등을 볼 수 있습니다. 맨 왼쪽은 성곽길 공사가 한창이네요.

정면으로 내려가면 독립문역쪽으로 나가는 길입니다. 서대문 형무소쪽으로 가는 길이죠. 경치가 정말 좋더라고요. 언덕에 자리한 주택들과 그 주택들 사이로 나 있는 작은 언덕길, 계단길.. 사시는 분들은 어떨런지 몰라도 저는 이런 풍경이 좋더라고요. 아파트 단지를 보면 답답한 느낌을 먼저 받거든요. 어쨌든 제가 거주 주민은 아니지만 살짝 아쉬운 느낌은 어쩔수가 없네요. 사진으로만 남아 있게 될 종로구 홍파동, 교남동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홍파동 교남동


홍파동 교남동
딜쿠샤, 홍난파 가옥쪽으로 올라오면 갑자기 시야가 뻥 뚫리면서 해발 338m의 인왕산이 바로 보입니다. 왼쪽이 범바위로 생각되고 정상의 매바위와 치마바위가 한눈에 들어오는 시원한 풍경입니다. 1차선 도로에 차량이 왕복으로 운행하는 다소 좁은 길이지만 많은 서울 시민들이 이용하는 길이죠. 왼쪽에 있는 집들은 이제 조만간 재개발로 다 사라질 겁니다. 앞으로이 곳에 빽빽한 아파트들이 들어선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답답해집니다.
홍파동 교남동
“1층이 3층이 되는 마술
이곳의 주택은 언덕에 위치한 관계로, 지하가 2층이 되기도 하고, 2층이 1층이 되기도 하는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주택 하나에서 지하방에서 창문을 열면 다른 집의 지붕이 보이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문 앞에 작은 화분이 정겹습니다.
홍파동 교남동
급한 계단 하나를 두고 많은 집들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경사가 심해서 벽 한쪽에는 손잡이까지 만들어져 있네요.
홍파동 교남동
라일락 향기가 마을을 휘감는 느낌이 들어 보니 작은 공간에 라일락 한그루가 있네요.
동네에 라일락 한그루만 있어도 온 동네가 피죤 라일락 향기를 맡을 수 있죠.
홍파동 교남동
교남동
안녕 꽃들아
올해일지 내년일지

어느 골목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해
꽃을 피우는구나
홍파동 교남동


홍파동 교남동


홍파동 교남동
내려올 땐 쉽게 내려왔는데 이렇게 보니 경사가 상당히 급하군요.
이곳 역사상 공사장 소리로 가장 시끄러운 시기가 조만간 오겠네요.
1층에 살아도 누구나 하늘을 볼 수 있었던 곳..
홍파동 교남동
개발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죠. 주민들의 선택이니까요. 얼마 남지 않은 교남동의 풍경이었습니다. 돈의문 뉴타운으로 지정이 되어서 조만간 공사가 시작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구 도심의 경우 상하수도 문제, 교통문제등이 겹쳐지고, 다른 지역에 비해 낙후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시간이 흘러 나중에 교남동의 옛 모습을 제 블로그에서 볼 수 있겠군요.

블친님들, 처음 방문하시는 다른 분들.. 기쁨 가득한 수요일 되세요. ^^
추천은 아무런 힘이 들지 않는 서비스랍니다. 그냥 살포시 꾸욱 눌러 주시면 됩니다.

딜쿠샤

딜쿠샤(DELKUSHA)
딜쿠샤는 힌두어로 "이상향, 행복한 마음"이라는 뜻이다. 이 건물은 3.1운동 소식을 전 세계로 타전한 UPI 통신사 특파원 알버트 테일러(Albert Taylor)가 1923년 집을 짓고, 1942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될 때까지 가족과 함께 살던 곳이다. 알버트 테일러는 금광엔지니어 겸 UPI 통신사 프리랜서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3.1운동을 세계에 알리고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다. 그러나 한국 독립을 도왔다는 이유로 그는 6개월간 수용생활을 하였으며 추방된 후 1948년 미국에서 사망했다.

이후 오랫동안 내력모를 집으로 남아 있다가 2006년 알버트 테일러의 아들이 한국을 방문하면서 건물의 비밀이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서울시는 66년 만에 서울 고향집 "딜쿠샤"를 방문한 미국인 브루스 테일러에게 2008년 "명예 시민증"을 수여하였다.


처음 보는 순간 "오~~" 하는 감탄사가 나오는 건물
서울 동네 골목길 관광 제 7코스 교남동. ⑤ 딜쿠샤

딜쿠샤
서울 동네 골목길 관광 제 7코스 교남동 중에 4번, 5번으로 있는 딜쿠샤 입니다. 종로구 행촌동을 지나는 도중에 만났는데 누가 봐도 한눈에 "다른 건축물이다!!"라는 것을 느낄 정도로 건물 모양이 다릅니다. 다소 흐린 날씨에 그냥 무작정 카메라 메고 걷던 길이었는데 뜻밖의 물건을 만난 듯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이런 기분은 여행지에서 예상치 못한 곳을 만났을 때의 기분 좋은 흥분감이 밀려 왔습니다. 더군다나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만났기에 더욱 더 느낌이 달랐습니다.

딜쿠샤라는 건물 주위로는 새로 지은 연립주택과 잘 닦여진 골목길이 눈길을 끄는데 비해서 딜쿠샤는 상당히 낡았습니다. 아래 사진을 보시면 알겠지만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벽돌부터, 지붕 아래의 나무판자까지 너무 낡아서 언제라도 뭔가가 떨어져 나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저런 건물에 사람이 살까 싶을 정도로 낡고 허름했지만 사람이 살고 있는 건물이었습니다.

사진에 보시면 아기를 업고 계신 동네 주민 한분과 파를 다듬고 계시는 할머니 한분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계십니다. 이 건물이 궁금해서 물어볼까 했는데 거주하는 분에게 물어보는 것은 예의가 아닌듯 해서 따로 알아보니, 이 건물은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건물이라 합니다. 건물 앞에는 이런 안내 문구가 붙어 있더군요.

국유재산 소유지 : 서울 종로구 행촌동
본 토지 건물은 국민의 소중한 나라재산으로 허가없이 사용할 경우에는 변상금 부과 처분등의 불이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소중한 나라 재산이 훼손되지 않도록 많은 협조 부탁드립니다.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건축물이지만 나라에서 문화재로 지정했기에 어떻게 처리를 하지 못하는 듯 했습니다. 그래서 건물 수리도 안되고 있고, 보존에 있어서 문제가 있어 보였습니다. 어떤식으로든 해결이 되서 건물에 사시는 분들이나, 건물을 보러 오시는 분들이나 모두에게 좋은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건물의 이름은 "딜쿠샤(행복한 마음)"인데 정작 건물은 행복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이 건물은 바닥과 창문등 많은 부분이 원형 그대로 있는 건물이라고 합니다. 알버트 테일러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는 6살때까지 이 건물에서 살다가 추방 당시에 같이 떠났다가 2006년 한국에 방문하면서 이 건물의 내력이 알려집니다. 그 이전에는 이 건물은 "그냥 오래된 집"으로만 알려져 있다가 무려 66년만에 제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죠. 대를 이어 한국사랑을 보여준 알버트 테일러와 브루스 테일러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들더군요..
딜쿠샤
딜쿠샤

딜쿠샤

딜쿠샤

딜쿠샤

딜쿠샤

딜쿠샤

딜쿠샤

딜쿠샤
권율장군 집터 및 행촌동 은행나무
이곳은 임진왜란의 영웅, 행주대첩의 승장인 권율장군의 집터이다. 권율장군의 집은 필운동 배화여고 뒤편에도 있었다. 권율장군의 사위가 된 백사 이항복이 이 집을 물려받았다고 한다. 표지석 뒤로 권율 장군이 직접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모진 풍파를 견디며 400여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또한 이 은행나무는 이곳의 지명을 행촌동(은행나무 마을)이 되게 하였다.

서울 동네 골목길 관광 제 7코스 교남동. ④ 권율장군 집터 및 행촌동 은행나무
그리고 그 바로 옆에 있는 권율장군 생가터에 있는 권율장군 집터와 은행나무 입니다. 행촌동 지명 유례가 되었다는 은행나무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잘 지어진 집 안쪽에 있는 것 같아 보이는데 실제로는 그 바로 옆에 집들 사이에 비좁은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시골 같았으면 넓직한 동네 앞마당이나, 바로 아래 평상이 있겠지만 서울 하늘 아래 시멘트 바닥에서 정말 고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서울 시내 구석구석 이런 곳이 얼마나 있을까 싶었습니다. 날 좋을 때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이곳의 위치는 지도를잘 보셔야 합니다. 지번으로는 검색이 되는데, 딜쿠샤라는 검색으로는 표시가 되어 있지 않더군요. 사직터널 위에 큰 은행나무를 찾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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