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꿈 - 더공

피카소의 꿈


1923년에 그려진 피카소의 "꿈"
유화, 130×97cm

<꿈>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여인은 바로 피카소의 네 번째 연인 마리 테레즈이다. 피카소는 1927년 첫째 부인 올가에게서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에 이 여인을 만났는데, 당시 테레즈는 불과 17살이었다. 피카소는 올가와 결혼한 뒤 귀족층과 어울려 파티를 즐겼으며 40대 이후에는 그림들이 파격적 가격으로 팔려 나감으로 점차 거부가 되어 갔다.

그 리하여 마리 테레즈를 만날 즈음에 그의 그림 값은 부르는 것이 값이 될 정도였다. 러시아 귀족 출신이었던 올가는 1921년 아들 파울로를 낳은 후, 유모, 요리사, 하녀, 운전사 등을 두어 점차 더 사치스런 생활을 했고, 피카소는 올가의 지나친 상류 사회 생활에의 집착으로 갑갑함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한다. 게다가 1924년부터 불기 시작한 초현실주의 문학 운동에 대한 피카소의 관심은 안정된 생활의 분열을 촉구하였다.

이러한 때에 피카소는 우연히 금발 머리의 젊고 아름다운 한 처녀, 마리 테레즈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녀는 그리스 고전 조각에서 볼 수 있는 똑바른 콧날과 푸른 회색 눈을 가진 아주 이상적 미인이었다. 테레즈는 피카소가 다가가서 자신을 소개했을 때, 당시 이미 유명한 화가였던 그를 알지 못할 정도로 미술에는 문외한이었으며 대화가 통하는 상대는 못되었던 듯 하다. 그러나 피카소는 그 아름다움에 반하여 6개월 동안 구애하였으며 결국 자신의 집 근처에 비밀리에 거처를 마련하여 그 후 몇 년간 열정적으로 이 여인을 소재로 한 작품을 그렸다.

어린 테레즈는 순종적이고 희생적이었다고 전하는데, 이러한 그녀의 특성을 드러내는 듯이 피카소는 독서를 하거나 잠들어 피카소에게 시선을 맡긴 테레즈의 모습을 즐겨 그렸다. 이 작품도 그 중 하나인데, 꿈을 꾸는 여인의 모습에서 평온함과 긴장의 이완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얼굴과 몸에서 푸른빛과 연분홍빛을 의도적으로 절반씩 사용한 것은 현실과 꿈이라는 두 세계를 표현하려고 한 의도가 아닐까 한다. 피카소가 그린 다른 여인들에 비해 마리 테레즈를 묘사한 작품들은 이처럼 부드럽고 아름다운 특징을 지니고 있어서 격정적이며 분석적인 다른 인물 표현과는 대조적이다.

한편 여기서도 인체를 해부하듯이 파악하여 표현하는 방식이 일부 엿보이기도 한다. 한 방향에서 바라보는 대상의 모습을 재현 하기보다는 대상의 다양한 모습과 특성을 한 화면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를 알 수 있다. 얼굴의 배치나 부분적으로 분리하여 그려낸 것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분석적인 표현보다는 평면적이며 아름다운 채색의 효과가 부드러우면서도 경쾌한 율동미를 느끼게 한다.

아마도 이 시기는 피카소가 마리 테레즈와 평온했던 한 때였던 듯 하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과 평안은 오래가지 못했으며 이후 1935년 테레즈가 22살의 나이로 딸을 낳았을 때, 피카소는 이미 도라 마르라는 지적이고 세련된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 1997년 당시 4천8백만 달러에 스티브 윈이 구입. (개인소장)

- 출처 : 다음, 네이버 지식, google 외 다수 -

왜 이러한 그림을 그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림에서 느껴져 나오는 것만 보자. 그림에서 풍겨져 나오는 느낌은 평안하고, 고요하고, 사랑스러움이 넘친다. 풍요로운 모습과 다소곳이 모으고 있는 손. 한쪽 어깨로 흘러내리는 윗 옷의 모습까지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살짝 미소를 머금은 입술. 부드럽게 감은 눈. 풍만한 가슴과 화려하지만 편안한 색상은 피카소가 그린 여러 꿈 중에서도 최고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907년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y Picasso:1881∼1973)가 그린 입체파의 선구적 그림. 

Les Demoiselles d'Avignon

작가 : 피카소
종류 : 캔버스에 유화
크기 : 243.9x233.7㎝
제작연도 : 1907년
소장 : 뉴욕 현대미술관


 이 작품은 1907년 늦은 여름에 완성됐다. 피카소는 이 작품을 위해서 몇달간 100여개에 달하는 데생을 그렸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덧칠을 한 대작이다.

작품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피카소만이 알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가장 친한 친구들조차 못보게 문을 걸어 잠그고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드디어 몇달이 흐르고 작품을 공개 했을 때 어려움과 배고픔을 함께 했던 친구들조차도 경악과 충격에 빠졌다. 그들은 이 작품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말문이 막혔기 때문이다.

그림은 구도도 없었고 인물의 모든 부분이 전체적으로 봤을 때 기괴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각도에서 보이는 모습을 한 인물에 표현했고, 이상스럽기까지한 이 그림에 동감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받아온 미술에 대한 모든 생각과 관점을 뒤집어버렸기 때문이다.

당시에 유명했던 마티스조차도 이 작품에 대해서 노여움을 표시했을 정도였고, 조르주 브라크(피카소와 절친한 친구)는 "자네는 우리가 톱밥을 먹고 석유를 마시길 원하는 것 같군." 이라며 작품에 대한 실망감을 그대로 표현했다. 또한 피카소라면 무조건 옹호했던 아폴리네르도 조차도 맹비난했고, 같이 동행했던 미술비평가는 "캐리커쳐에 전념하는 것이 어떻겠냐"라며 충고했다.

시간이 흘러 다른 비평가는 이렇게 말했다. "이 그림은 마치 부서진 유리 파편같다". 의도는 알 수 없지만 결과론적으로 본다면 정확한 말이라고 생각된다. 이 그림은 그 이전에 그려졌던 과거의 모든 상식적인 그림을 유리파편처럼 날려버린 것과 같은 결과를 얻었기 때문이다. "아비뇽의 처녀들"은 새로운 현대 미술사의 시작이었다.

20세기 시작을 알리는 "입체주의"의 시작은 이렇게 혹독하게 시작되었다. 온갖 혹평과 악평, 경악에 빠뜨리고 미술계에 작은 스캔들을 일으키면서 말이다.

그러나 칸바일러라는 독일의 젊은 수집가는 모두의 의견에 반대했고 "아비뇽의 처녀들"에 매료됐다. 칸바일러는 이후에 금세기 최고의 현대회화상이 되었다. 칸바일러는 그 후로도 피카소 그림에 푹 빠져버렸다.
피카소가 이 그림을 평가하는데에는 그냥 실소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가운데에 있는 여인의 얼굴을 보자. 주름잡힌 커다란 눈과 8자 귀. 거기다 코는 옆으로 누웠다. 피카소는 코를 이렇게 그린 것에 대해서 명확하게 대답한다. "옆으로 그린 코요? 그건 의도적인겁니다.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반드시 코라고밖에 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지요"

맞는 말이다. 누가 봐도 저건 코다. 아이들의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면 피카소 그림과 유사한 점이 있다. 아이들은 코를 옆으로 뉘어서 그리는 경향이 있다. 사실 인물 그리다 보면 코가 생각보다 어려운 점이 있다. 얼굴 중에서 가장 많이 튀어나온 부분이라 그런지 조금만 비뚤어져도 얼굴 전체가 이상하게 보이는 가장 중요한 부위이다. 피카소는 그런 어려운 부분을 아주 회화적으로 표현하면서도 너무 어색하지 않게끔 만들었다.
오른쪽 두 여인의 얼굴과 몸은 왼편의 세 여인보다 더욱 복잡하고 단순화되고, 분할 된 모습을 보인다. 왼쪽 여자들과도 많이 틀린것을 알 수 있다. 마치 아프리카 가면과도 비슷한 얼굴 모습이다. 하지만 얼굴은 대체로 분할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위 사진에서 왼쪽에 있는 것은 실제 피카소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아프리카 가면인데 비슷한 느낌이 드는가?

아프리카 가면은 19세기 서아프리카 원주민 "팡(Fang)족이 만든 가면인데 최근(2006년6월17일)에 프랑스 파리 드루오 경매소에서 590만유로(약 71억5천만원)가 넘는 값에 팔렸다.

"아비뇽의 처녀들"은 몇년이 지난 후에 제목이 붙여졌다. 하지만 원래 이 그림의 제목은 "아비뇽의 매춘부"였다.



참고자료 : 네이버/피카소 성스러운 어릿광대(시공사)/Google/daum/Picasso.com/
글 : 더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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