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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Travel

(경기) 고양 l 왕실의 태실이 묻혀 있는 서삼릉

by 더공 2010. 5. 19.
서삼릉(西三陵) : 사적 제200호
희릉(禧陵) · 효릉(孝陵) · 예릉(睿陵)의 3능을 일컫는 말이다.
희릉(禧陵)은 조선 제 11대 중종(中宗)의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의 능이다. 중종(中宗) 32년(1537) 경기도 광주에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원래는 중종(中宗)의 정릉을 희릉(禧陵) 곁에 썼으나 명종(明宗) 17년 (1562)에 정릉을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성종(成宗)의 선릉(宣陵) 곁으로 옮기면서 희릉만 남게 되었다.

서삼릉은 원당 종마목장 바로 옆길을 따라서 위치하고 있다. 종마목장을 본 후에 그늘이 많은 서삼릉을 한번 둘러 보는 것도 좋은 코스다. 능에 조성되어 있는 잔디를 밟는 것도 좋고 울창한 나무 숲을 걷는 것도 좋다.
그런데 이런 곳 바로 옆과 뒤로 원당 목장이 확장되었고, 외곽순환도로가 건설되어 보면 볼수록 안타까운 현실을 만나곤 한다. 옆의 사진을 눌러보면 서삼릉은 마치 목장과 길, 골프장에 둘러 쌓인 섬 처럼 보인다.

더군다나 이곳은 단순하게 조선왕조의 무덤만 있는 곳이 아니다.

서삼릉에 조선왕조의 태실이 묻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일반인 관람은 제한되고 있지만 30인 이상의 단체 학술관람시에는 태실 관람이 가능하다. 물론 일반 서삼릉 출입구와는 별개로 만들어져 있다.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 시절을 거치면서 철저하게 파괴된 것이 사실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강제로 태실이 옮겨왔고 옮기는 도중에 태실을 보관하던 항아리와 태지석을 바꿔치는 만행을 일본인들이 저지른다.

또한 135만평에 달하던 넓은 서삼릉 지역이 1960년 군사정권에 의해서 낙농 방목 초지로 바뀌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국 각지에 엄격하게 보관되어 있던 태실은 1930년대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태실이 파괴될 염려가 있다"는 명분으로 태실이 보관되어 있던 왕과 왕손의 태실 54기를 파내 서삼릉 태실을 조성했다.
-연합뉴스 2006.02.22-

몇몇 비석에는 태실을 옮긴 날짜가 누군가에 의해서 지워져 있다. 지워진 날짜는 소화(昭和) 몇년이라는 날짜인데 치욕적인 것이긴 해도 역시나 그것 또한 아픈 역사인데... 우리 문화재를 보고 관람하다 보면 수백, 수천년에 걸쳐서 이뤄진 문화와 역사가 수십년만에 철저하게 파괴되고, 망가진 것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저절로 든다.
예릉(睿陵)은 조선 제25대 철종(哲宗)과 왕비 철인왕후 안동김씨(哲仁王后安東金氏) (1834-1878)의 능이다. 철종(哲宗)은 전계대원군 광의 셋째 아들로 순조 31년(1831)에 태어났다.

헌종이 재위 15년 만에 자손이 없이 돌아가시자, 그 이듬해 대왕대비인 순조의 비 순원왕후 김씨가 강화도에 살고 있던 철종을 불러들여 19세 때 창덕궁 인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처음에는 대왕대비가 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렸고, 그 뒤는 외척의 세도로 인하여 국정을 바로잡지 못하고 재위 14년(1863) 12월 33세로 창덕궁에서 돌아가셨다.

철인왕후(哲仁王后)는 영은부원군 김문근의 딸로 철종 2년(1851)에 왕비가 되었고, 고종(高宗) 15년(1878) 42세로 창경궁에서 돌아가셨다. -안내판 참조-
서삼릉 가는방법
대중교통 : 삼송역 5번출구 -> 마을버스 41번
자가용 : 네비게이션 ㄱㄱ

입장료 : 어른 1000원. 어린이 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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