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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Travel

(충북) 충주 - 여름날 충민공 임경업 장군을 만나다 충렬사

by 더공 2010. 10. 28.

충주 / 충렬사 / 더공

충주 l 충렬사 임경업 l ⓒ 더공

충렬사는 충주 시내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데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서 그런지 관광객은 단 네명뿐이었습니다. 그나마 관광객도 나머지 두명은 연인이 사진찍으러 온 것이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충주 주변의 다른 곳보다 훨씬 아담하고 좋았습니다. 규모는 작지만 걷기 좋은 길과 태양을 피할 수 있는 의자가 있는 곳은 충렬사가 제일 좋았습니다. 더군다나 관람료는 1000원입니다. 말 그대로 그냥 형식적인 관람료죠.

충주 l 충렬사 임경업 l ⓒ 더공

잔디는 깨끗하게 손질되어 있고, 유품과 유물도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습니다. 충렬사 안에는 작은 연못도 있고, 유품을 전시하는 작은 전시관도 있습니다. 여름은 녹음이 우거진 곳으로.. 가을에는 단풍이 가득한 곳으로 기억될만한 곳이 바로 충렬사죠.

비록 사당이지만 역사적으로 유명한 충렬사는 꼭 가보기 바랍니다. 특히 충주와 단양 여행을 하신다면 하루를 마무리 하는 의미로 살짝 둘러 보셔도 좋을 듯 합니다.
충주 / 충렬사 / 더공

충주 l 충렬사 임경업 l ⓒ 더공

박물관
입구에서 들어가서 보면 옆에 작고 아담한 박물관이 있습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잔디며 보도 블럭이 정말 깨끗하게 정리정돈되어 있습니다. 보통 문화재라고 보면 관리 소홀이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비해 충렬사는 관리가 상당히 잘 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충주 / 충렬사 / 더공

대한민국 l 충주 l 충렬사 임경업 l ⓒ 더공

추련도

당시에 썼던 추련도 입니다. 칼날을 직접 보면 베는 것 보다는 그냥 때려서 적을 물리치는 용도와 비슷한 칼날 입니다. 저 칼로 베는 걸 하려면 엄청난 힘이 필요했을 듯 싶기도 하더군요. 보통 영화나 드라마에서 봐 오던 일반적인 칼날과는 확연히 다른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칼을 보면서 느낀 점은... "무 도 베기 힘든 칼 날인데 어떻게 싸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충주 / 충렬사 / 더공

대한민국 l 충주 l 충렬사 임경업 l ⓒ 더공


 
충주 / 충렬사 / 더공

대한민국 l 충주 l 충렬사 임경업 l ⓒ 더공

박물관 내부 전경입니다. 작고 아담하죠? 인사동의 작은 갤러리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규모가 작지만 하나하나 살펴보다 보면 시간이 금방 흘러 갑니다. 그동안 우리가 봐 왔던 역사적 유품들은임금, 장군, 양반들이나 써 오던 고급스러운 유품들이었는데 비해서 이곳에 전시된 유품들은 소박하지만 땀냄새가 그대로 베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대한민국 l 충주 l 충렬사 임경업 l ⓒ 더공
충주 / 충렬사 / 더공 충주 / 충렬사 / 더공
충주 / 충렬사 / 정부인완산이씨 정렬비 / 더공

대한민국 l 충주 l 충렬사 임경업 l ⓒ 더공

정부인완산이씨 정렬비

별묘 앞쪽에는 쌍성각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정조 12년(1788) 임경업 장군과 그의 부인 전주이씨의 충렬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장군의 부인도 금교역에서 장군이 탈출한 후 청나라로 가족들과 함께 잡혀간 뒤 다른 가족들은 모두 되돌려 보냈으나 부인만은 임경업의 행방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매일 고문하며 실토를 강요하니 영웅의 아내답게 "우리 주인은 대명의 충신이요 나는 그 충신의 아내다. 오랑캐의 옥중에서 욕을 보며 남편의 충절을 욕보일 수 있겠는가"하고 칼을 뽑아 자결하였으니 영웅의 아내답게 옥중에서 충성을 다한 죽음을 맞았다. (자료 충주시청 홈페이지)
충주 / 충렬사 / 더공

대한민국 l 충주 l 충렬사 임경업 l ⓒ 더공

충민공 임경업 영정

시 대 : 조선
유 형 : 회화류
지 정 : 지방유형
지정번호 : 지방유형문화재 제179호
지정일자 : 1995. 6. 30

충민공 영정은 공이 47세때 (1640년 6월) 명나라 장사가 황제에게 공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명나라 화사를 보내서 그렸다고 전하고 있다. 정면상의 전신교의 좌상으로 견본채색 바탕에 운문이 있는 관복을 입은 모습으로 안면 윤곽선을 짙게 표현하였으며 안정적인 인상을 준다. 옷주름은 필선으로 죽죽 그려내려 도안적인 느낌을 강하게 받게하며 흉배는 인조때 나라에 공이 컸던 무신에게 내렸던 도식화된 특이한 흉배를 하고 있다.

뒷편에 보이는 탁자 위에는 송, 죽, 매가 꽂혀진 백자화병과 금빛 연화대좌에 앉은 해태상 향로가 올려져 있는데 향로의 연기가 실타래 얽힌 듯 복잡한 곡선을 그리며 피어오르고 있으며, 탁자의 윗부분에는 용을, 아래에는 인물산수와 새, 나뭇가지를 표현하였는데 주인공 뒤에 배치한 탁자가 매우 독특하게 보인다. 이 영정은 충주시 살미면 세성리 150-11번지 충민공 별묘[조선 숙종 23년(1697)에 건립되었으나 퇴락되어 1989년에 중건하였음]에 봉안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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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

시 대 : 조선
유 형 : 사우
지 정 : 사적
지정번호 : 사적 제189호
지정일자 : 1969. 11. 21

충렬사는 인조때 임경업장군 (1594~1646)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숙종23년 (1697)에 건립하고 영조3년 (1727)에 사액되어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장군의 충렬비와 부인 완산 이씨의 정열비가 있는데 충렬비는 정조 15년 왕이 친히 글을 지어 비석에 새겨 전하게 하였으니 어제달천충렬사비이다. 또한 비문은 조선금석총람에 실려 있다. 임경업장군은 선조 27년 (1594)에 판서 임정의 후손인 임황 의 아들로 충주 풍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영백이며 호는 고송이라 했으며 본관은 평택이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뛰어났으며 전쟁놀이를 좋아했고 전쟁놀이를 할 때마다 스스로 항상 대장이 되어 남을 지휘하는 성품이었다.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아 25세 때인 광해군 10년(1618)에 무과에 급제를 하였으며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 훈일등으로 공신이 되었고 인조 14년 (1636) 병자호란때에는 의주부 윤으로서 청군의 침입을 저지코자 백마성을 쌓아 지키고 있었는데, 청군은 이를 피하여 서울을 함락하고 남한산성을 포위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는 반청친명의 인물로서 북벌의 명장이다. 명나라의 힘을 빌어 청에 대항코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명나라에 망명하였고, 청이 명나라의 남경을 함락하자 포로가 되었으나 끝까지 충절을 굽히지 않았다. 때마침 심기원의 모반사건에 관련되어 인조는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선으로 송환하였다.

인조는 그가 모반에 관련이 없음을 알고 석방하려 하였으나 반대파인 김자점의 모함으로 피살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에 50년 후인 숙종23년(1697) 관작이 회복되었고, 숙종 32년(1706) 에는 충민의 시호가 내려졌다. 충렬사의 건물은 사당이 목조와가 3간 맛배지붕이며 강당은 목조와가 10간 8작 지붕으로 단청되어 있었는데, 퇴락되어 정부의 특별지원성역화 사업으로 1978년 충렬사를 완전 해체하고 오늘의 충렬사를 새로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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